ㅤHERBARIUM
NOIR
pistol
NOIR
KAMBER




사실
정말 하고 싶은 일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
그러니 그 모든 건 단지 투정에 불과했고

이유는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빅터 험멜은 유리잔에 담긴 위스키를 천천히 돌리며 라운지에 섰다. 워터스 부부가 주최하는 이번 만찬 모임에는 시의 여러 유력 인사들과 그들의 부인이 참석했다. 빅터는 금융가로서 이런 자리에 자주 참석하면서도 늘 이런 사교적인 모임이 귀찮았다.
그때 빅터의 시선이 한 남자에게 닿았다. 의식적인 흐름은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 남자가 변호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빅터의 아내, 주윤의는 다른 부인들과 함께 피아노 근처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고, 누군가가 캠버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해밀턴 법 때문에 요즘 변호사들 바쁘겠어. 범죄자들 변호하느라."

"일이 많지. 좋은 시대야."



캠버는 회장 안을 바쁘게 돌아다니는 서버를 불러 빅터의 잔을 채워 주었다.



"그런 일들은 꽤 피곤하잖아. 범죄자들 상대하는 거. 서류 작업도 많을 거고. 좋은 시대라고 하기엔 당신 얼굴은 꽤 지쳐 보이는데."


"종종 그런 얼굴들이 있지. 원래 이 모양이야. 이건 세월이 만든 얼굴이 아니거든."



캠버의 시선이 빅터의 손목께로 향했다. 그가 시계를 차고 있는지, 차고 있다면 어느 정도로 고가의 시계를 차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시선이었다. 이런 파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야 대부분이 상류층 사람들이 분명했거니와, 질좋은 송아지 가죽을 연상시키는 빅터의 자켓을 보고도 그랬다.
빅터는 일부러 왼손에 들고 있던 위스키 잔을 오른손으로 옮겨 잡았다. 그의 왼쪽 손목에 채워진 파텍 필립의 플래티넘 케이스가 라운지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캠버가 쉽게 알아볼 수 있을 만한 부와 지위를 상징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세월 대신 다른 무언가가 만들었다는 건가. 흥미로운 말이네. 나는 빅터 험멜이라고 해. 상무경제발전국에서 일하고 있지. 당신 말대로, 좋은 시대 덕분에 나도 꽤 바쁘게 지내는 편이야."



캠버는 빅터의 말에 짧게 웃었다. 홍콩의 무역 정책을 담당하는 핵심기구, 그는 자신의 명함 지갑을 꺼내 들더니 빅터에게 한 장 건네었다.



"변호사 명함을 주는 건 불쾌할 수도 있겠지만, 위로가 필요할 땐 이것만 한 게 없거든. 기쁜 일엔 함께하지 못해도 나쁜 일에는 가장 사랑스러운 친구가 되어줄게."



캠버는 뒤이어 다른 명함도 건네어 주었다.



"꽤나 고상한 취향을 가진 것 같아서 하나 더 챙겨줄게. 내 아내가 좋은 취미를 갖고 있어. 미술품을 수집하고 있어서 한 번씩 갤러리를 운영하거든."


"아내의 취미 생활까지 챙겨주는 걸 보니, 다정한 남편인가 보네."



빅터는 첫 번째 명함을 안주머니에 넣고, 갤러 명함을 가볍게 흔들었다. 종이의 질감과 인쇄가 꽤 고급스러웠다. 아내의 취미라기엔 제법 본격적인 사업처럼 보였다.



"아내의 일은 전적으로 지지해 주는 쪽이야. 나는 변호사지, 감정사나 경매사가 아니니까."



빅터가 잠시 자신의 아내가 있는 쪽을 흘깃 쳐다보았다. 여전히 다른 부인들과 어울리고 있는 걸 보던 빅터를 따라 캠버의 시선이 넘어갔다.



"피아노도 좋지. 부인은 직접 연주하는 걸 즐기나? 아니면 듣는 쪽?"


"듣는 쪽이지. 연주에는 영 재능이 없어. 대신 재즈 클럽에 가는 걸 아주 좋아해. 물론, 합법적인 곳으로만."


"내 아내는 미술품을 수집하고, 당신 아내는 음악을 듣고. 다들 좋은 취미를 가졌네. 당신은 어때?"


"여자들의 취미에 비해서 남자들의 취미라는 건 꽤 고루한 구석이 있지. 골프, 테니스, … 전부 다 별로 재미없더군. 굳이 꼽자면 카드 게임 정도는 즐기는 편이야. 포커 같은 거."



이야기를 듣던 중, 캠버는 호기롭게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는 빅터에게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변호사들은 포커페이스에 능하잖아. 나도 그런데, 어때? 당신 명함을 받고 싶군. 다시 보게 되면 게임이나 하지."


"내 명함이 필요한가? 보통은 당신 명함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나쁜 일이 생겼을 때만 연락하면 되는 것 아니었나?"



빅터가 능청스럽게 되물으며 안주머니에서 자신의 명함 지갑을 꺼냈다. 빅터 험멜이라는 이름과 함께 그의 사무실 주소가 간결하게 찍혀 있었다.



"좋은 그림이 있다는 당신 아내 갤러리에도 한번 들러야겠군. 아내가 좋아할 만한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물론, 카드 게임 약속을 잡을 겸해서."



시간은 무심하게 흘렀다. 홍콩의 시계는 언제나 그랬듯이 여전히 바쁘게 돌아갔고, 빅터의 일상 또한 변함없이 흘러갔다. 그는 캠버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카드 게임을 하자는 제안은 충동적인 호기심이었을 뿐이었고, 언젠가 다시 마주칠 기회가 있으리라 막연히 생각할 뿐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난 다이닝 룸에 주윤의가 달콤한 계피향이 맴도는 호박 파이를 들고 왔다.



"국장님 사모님께서 알려준 레시피인데, 아주 근사하게 만들어졌어요. 맛 좀 보세요."



주윤의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하며 빅터의 맞은 편에 앉아, 테이블 위에 놓인 우편물 더미를 자연스럽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청구서, 은행에서 온 서류, 그리고 사교 모임 초대장들이 섞여 있었다.



"참, 그리고 오늘 우편물 중에 당신이 좋아할 만한 게 있던데. 어디서 온 건지 알아요?"



여러 봉투 사이에서 유독 고급스러운 질감의 봉투 하나를 집어 든 주윤의가 미소 지었다.



"지난번 워터스 씨 댁에서 만났던… 그 변호사 부인 있잖아요. 갤러리를 운영한다던. 거기서 보낸 초대장이더라고요. 새로 들여온 유럽 화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작은 리셉션을 연대요."



갤러리 초대장을 받아 든 빅터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 변호사라는데 좀 독특했어. 변호사라는 사람이 변호사처럼 보이지는 않더군. 어쨌거나, 그 갤러리 리셉션이 언제라고? 당신도 유럽 화가들 작품 좋아하잖아. 시간되면 같이 가보지, 뭐."


"고마워요, 여보. 좋은 친구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파이는 어때요? 사모님이 시나몬을 호박 파이에 뿌리면 좋다면서 상급품을 선물해줬거든요. 맛있으면 그만한 답례를 드려야겠죠."


"파이 맛있네. 시나몬 향이 좋군. 사모님께는 답례로 괜찮은 브랜디라도 한 병 보내주지. 국장님이 술을 좋아하시거든."



빅터는 갤러리 리셉션이 열리는 날짜에 맞게 캘린더에 일정을 기록했다. 캠버 갤러리. 아내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면서 자신의 이름을 내어준 것인지, 아니면 그저 우연의 일치인지. 주윤의는 미소를 지으며 우편물을 다시 정리하고 있었다. 그에게 이 리셉션은 그저 또 하나의 사교 행사, 남편의 새로운 친구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의 아내가 주최하는 파티일 뿐이었다.



갤러리에 들어서는 순간, 빅터는 예상보다 훨씬 더 떠들썩한 분위기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공간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 그리고 시야를 어지럽히는 과한 꽃다발과 선물들. 빅터의 옆에 선 주윤의는 반짝이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와, 정말 대단하네요. 캠버 씨 부인, 수완이 보통이 아닌가 봐요.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을 모으다니."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갤러리의 주인인 캠버 부인이었다. 깡마른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모피 코트를 걸치고 있는 모습이 꽤 이질적으로 보였다. 캠버는 아내와는 대조적으로, 차분한 회색 정장 차림으로 몇몇 손님들과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주변과 미세하게 동떨어진 듯한 모습은 한 달 전 파티에서와 똑같았다.



"여기 변호사도 있군. 갤러리 주인이 무슨 법적인 문제라도 일으킨 건가?"


"돈세탁을 하려는 나쁜 손님들과 엮이려던 걸 잡아줬지. 그 사람은 내가 여기 올 자격이 있다고 했어."


"자격이라… 당신 아내는 대단하더군. 갤러리 안이 발 디딜 틈이 없어. 내 아내도 저기서 부인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당신은 이런 시끄러운 자리가 익숙한가? 표정은 별로 즐거워 보이지 않는데."



빅터의 말은 관찰에 기반한 사실이었다. 캠버는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어딘가 겉도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 마치 의무감 때문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처럼.



"하기야, 당신은 원래 그런 얼굴이라고 했지. 세월이 만든 게 아니라."



캠버는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리며 빅터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늘 전시가 끝나면 이전에 말했던 카드 게임이나 하자고. 사모님께서는 게임을 좋아하나? 내 아내 만큼이나 밝은 사람 같던데."


"카드 게임이라, 좋지. 마침 오늘 밤은 다른 약속도 없으니."


리셉션의 화려함과 소음이 완전히 가신 뒤, 빅터는 캠버가 알려준 주소의 낡은 건물 앞에 섰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이발소였지만, 뒷문으로 들어가자 축축하고 서늘한 공기가 그를 맞았다. 좁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담배 연기와 술 냄새, 그리고 사람들의 흥분된 목소리가 뒤섞인 공간이 나타났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카지노였다.
룰렛 테이블, 포커 테이블, 블랙잭 테이블을 지나 안쪽, 조금 더 비밀스럽게 마련된 프라이빗 룸 입구에 기대 서 있는 캠버가 보였다. 캠버는 리셉션에서의 정장 차림 그대로였지만 넥타이는 조금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빅터가 다가가자 고갯짓으로 룸 안을 가리켰다.
카드 테이블 하나와 의자 두 개, 그리고 술병들이 놓인 사이드 테이블이 룸의 전부였다. 캠버는 위스키 병을 들어 빅터 앞에 놓인 빈 잔을 채워 주었다.



"카드 게임을 하자고 했지. 그런데 이런 곳으로 불렀다는 건… 판돈을 꽤 크게 걸 생각인가 보네. 당신 아내의 갤러리 수익금이라도 전부 걸 생각이야?"



농담이었지만, 눈빛은 진지했다. 그는 캠버가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단지 카드 게임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분명히 해볼까? 물론 그건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이 아니지. 당신은 명확해야만 살아남는 곳에서 모호한 말을 꾸미는 데 익숙해 보이고, 나는 모호해야만 살아남는 곳에서 꽤 직선적으로 구는 데 익숙한 사람이니까."



캠버는 다리를 꼬고 앉으며 새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그는 칩을 빅터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이미 게임은 시작됐어. 난 네가 ■■를 원한다고 생각해."



순간 숨소리가 끊어졌다. 그동안 유지해왔던 여유와 표정 뒤에 숨겨두었던 욕망이, 캠버의 그토록 짧은 말 한 마디에 적나라하게 발가벗겨진 기분이 되었다.
캠버가 담배에 불을 붙이는 동안, 빅터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심장이 평소보다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 맞아."



빅터의 입에서 낮고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욕망을 숨기거나 돌려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그게 뭐? 그게 이 게임의 판돈인가? 내가 원하는 것. 그럼 당신이 원하는 건 뭔데?"


"명성과 부. 이번 리셉션은 3일 동안 열려. 그 중에 내가 말하는 그림을 사."



캠버는 빅터의 욕망을 미끼로, 빅터의 재력을 이용해 아내의 성공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빅터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그는 테이블 중앙에 쌓인 칩 더미와, 그 너머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캠버를 번갈아 보았다. 담배 연기가 두 사람의 사이를 흐릿하게 가렸다.



"좋아. 거래하지. 당신이 말하는 그림, 내가 사지. 가격이 얼마든 상관없어. 당신 아내의 갤러리는 하룻밤 사이에 가장 유명한 장소가 될 거고, 당신은 원하는 명성과 부를 얻게 되겠지."



자리에서 일어난 빅터가 테이블을 돌아 캠버의 곁으로 다가갔다. 담배 연기가 빅터의 얼굴에 바로 닿았다.



"하지만 게임이 계속되는 한, 너도 값을 치러야 할 거야."



그림은 빅터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집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주윤의는 그 그림을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 했다. 그는 빅터의 새로운 친구인 캠버 부인의 안목을 칭찬하며, 이 그림이 저택의 가치를 한층 더 높여줄 거라며 기뻐했다.
그 주 주말 저녁에는 리셉션 성공 기념 축하 파티가 열렸다. 그 축하 파티는 그날 홍콩에서 가장 화려하게 치러졌다. 그건 지난 리셉션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축하하는 자리인 동시에 뒤이어 열릴 갤러리의 투자자와 기부자들을 끌어 모으는 자리이기도 했다.
초대장을 보여주며 입장하는 사람들은 캠버 부인의 파티에 방문했다기보다는 하니의 비즈니스 자리이자 상류층의 사교 모임 쯤으로 이 파티를 이용했다. 캠버 부인은 파티 주최자로서의 역할을 다하며 바쁘게 인사를 돌았다. 그는 지난 갤러리에서 팔리지 못한 그림을 넌지시 부풀려 말하며 다음 주인을 찾아 다녔다.
주최 측에서 준비한 저녁 식사 자리가 마련될 때쯤, 캠버 부인은 험멜 부부를 VIP룸으로 초대하며 내실로 안내했다. 캠버는 그곳에 있었다.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험멜 씨, 그리고 부인. 저는 제 부인의 남편, 캠버 리입니다."



캠버는 자리를 직접 안내해 주면서 아내의 허리를 감싸며 무언가를 낮게 속삭였다.



"험멜 씨께서는 3일 동안의 갤러리를 다녀 간 가장 훌륭한 손님 중 한 명이었죠. 험멜 씨의 안목과 담대한 결정에는 존경을 표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기실 이 파티는 험멜 부부를 위한 파티이기도 해요. 단 두 분을 위한 감사 파티죠. 아무쪼록 파티가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잔을 들까요? 험멜 씨에게 존경을, 캠버의 성공과 우리 우정을 위하여."



캠버와 그의 부인이 나란하게 잔을 들어 올렸다. 캠버 부부의 완벽한 이중창은 빈틈이 없었다. 한 사람은 빅터의 안목과 결단력을 칭송하고, 다른 한 사람은 이 파티가 오롯이 험멜 부부를 위한 것이라며 감사를 표했다.
주윤의는 캠버 부부의 과분한 칭찬과 환대에 진심으로 감동한 듯, 살짝 상기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빅터의 옆구리를 가볍게 찌르며, 어서 잔을 들라며 눈치를 주었다. 빅터는 아내의 순진함에 쓴웃음을 삼키며 마지못해 잔을 들어 올렸다.



저녁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리고 응접실에 들어서는 지금까지, 주윤의는 오늘의 파티가 얼마나 훌륭했는지에 대해 쉴 새 없이 이야기했다. 그는 진심어린 흥분과 만족감으로 들떠 있었다. 빅터는 소파에 깊숙하게 몸을 기댄 채,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아내의 말을 듣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의심했었어요. 변호사들은 전부 사기꾼이죠. 미술품을 다루는 큐레이터는 사업가일 뿐이고요. 그렇지만 캠버 부부가 오늘 보여준 정성에는 정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주윤의는 사람을 꿰뚫어보는 눈이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캠버 부부가 보여준 연극에 완벽하게 속아 넘어갔다. 주윤의가 감탄한 그 모든 것들은 결국 빅터가 저지른 배신과 부도덕 위에 세워진 신기루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주윤의의 감동은 순수한 것이었다. 그 순수함이 빅터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집에 도착한 빅터는 더 이상 주윤의와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먼저 침실로 향하겠다며 등을 돌렸다.



빅터는 테이블 위의 파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당장 파일을 열지 않고, 시선을 캠버에게로 고정한 채였다.



"내가 당신에게 무얼 더 해 줄 수 있는 지 모르겠군. 내게 더 원하는 것이 있나?"


"있잖아, 험멜 씨. 당신이 나와 손해 보는 거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야. 당신이 내 부인의 갤러리에 전시하고 있던 그림을 고가로 매입했다는 건 사실이지. 하지만 그 그림은 당신이 구입함으로써 당신이 매입한 금액보다 훨씬 더 많은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고. 하지만 되팔더라도 수만 달러는 호가하는 차액을 벌어들일 수도 있으면서 왜 이렇게 비정하게 구는 거야?"



빅터는 협상가였다. 모든 투자는 리스크를 동반하고, 성공적인 투자는 투자금 이상의 가치를 창출한다. 주윤의의 갤러리에 건 그림은, 캠버의 말대로 이미 구매가를 훌쩍 뛰어넘는 가치를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사업적인 관점에서 보면, 빅터는 완벽하게 성공적인 투자를 한 셈이었다.
빅터는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당신은 변호사야."



빅터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말이야, 캠버. 손해 보는 기분을 아주 싫어해. 설령 실제로 손해를 보지 않았더라도, 상대가 나를 이용해 영리하게 잇속을 챙겼다는 사실 자체를 견디지 못하지. 그건 내 자존심의 문제야. 돈의 문제가 아니라. 그러니까 당신이 영리하게 굴면 굴수록, 나는 더 비정해질 수밖에 없어. 당신이 내게 더 많은 것을 원할수록, 나는 당신에게서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대가를 받아내야만 해. 그래야 균형이 맞잖아."


"……"


"그러니 다시 묻지. 내가 이 부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넌 내게 뭘 줄 거지? 이 불쾌감을 종식시키고, 내가 충분히 만족할 만한 걸 내놓으라고."


"무슨 부탁인지 들어보지도 않고?"



캠버는 빅터의 말을 받아치지 않고, 그저 파일의 내용을 먼저 확인하라는 듯이 고갯짓했다.



"그렇게 해. 파쇄기에 집어넣어도 상관 없어. 대신 그렇게 되면 당신도 내게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겠지. 그래도 상관없어?"


"… 상관 없을 리가. 당신은 정말…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빅터는 소파에 완전히 몸을 파묻었다. 피곤하다는 말은 진심이라는 듯, 그는 마른 얼굴을 느리게 쓸었다.



"그래서, 이 안에 든 게 뭔데? 나를 이렇게까지 피곤하게 만들 만큼의 가치가 있는 건가?"


"서류철에 있는 주소의 땅을 매입할 생각이야. 아내가 그곳에 갤러리를 세울 거거든."



캠버는 자신의 눈썹 앞머리를 느리게 문지르며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빅터와의 대화가 드디어 트랙 안으로 들어오자 캠버는 비즈니스적인 논조로 말을 꺼냈다.



"1월 전까지 이 근처의 부지를 전부 매입해. 네 명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도 좋아. 필요한 ID 카드는 내가 제공해 주지."



단순한 땅 매입일 리가 없었다. 저 주소 주변에 분명 무언가가 있을 터였다. 곧 개발 계획이 발표될 예정이라거나, 중요한 시설이 들어설 계획이라거나. 캠버는 변호사로서 얻은 내부 정보를 이용해 막대한 시세 차익을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자금 조달과 실무를 빅터에게 떠넘기고 있었다.



"당신은 정말이지… 정말이지 겁이 없군. 내 돈으로, 내 인력을 이용해서, 당신 아내의 갤러리를 세우고, 당신은 그 과정에서 차익을 챙기겠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나를 당신의 사업 파트너, 아니, 자금책으로 쓰겠다는 통보잖아."



감탄과 경멸, 그리고 기묘한 흥미가 뒤섞인 시선이 캠버를 향했다.



"이게 성공하면, 당신은 돈과 명예를 모두 얻겠지. 하지만 만약 실패하면? 모든 리스크는 땅을 매입한 내가 지게 될 거고, 나는 공범이 되는 것 아닌가?"



캠버의 제안을 받아들인 후, 빅터는 가장 유능한 대리인들을 동원해 캠버가 지정한 부지를 조용히 사들였다. 폴 랭글리는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가명 중 하나에 불과했다. 들키지 않기 위해 여러 개의 차명 계좌를 이용해 자금을 쪼개고, 각기 다른 대리인들을 통해 점조직처럼 움직였다.
하지만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작전에도 빈틈은 있었다. 하필이면 주윤의가 그 수많은 가명 중 하나의 이체 내역서를 발견한 것이었다. 빅터는 이제 막 침실로 들어서려던 참이었다.



"여보, 이게 뭐예요? 폴 랭글리라뇨?"



주윤의의 목소리는 날카롭고 불안에 차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이체 내역서에 적혀진 금액은 작은 돈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런 상의도 없이 거액의 돈이, 그것도 낯선 이름으로 빠져나갔다는 사실에 주윤의는 큰 충격에 빠져 있었다.
빅터는 순간 심장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캠버와의 거래, 차명 계약, 그 모든 비밀이 한순간에 드러날 수도 있는 위기였다.



"폴 랭글리… 아."



빅터는 이체 내역서를 부드럽게 빼앗아 들고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서류를 보는 척하다, 뒤늦게 기억났다는 듯이 짧은 탄성을 뱉었다. 빅터는 내역서를 협탁에 내려 놓고 주윤의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당신에게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어. 장거에게 빌려준 돈이야."



장거. 장거는 빅터의 친구였다. 사업 수완이 좋지만 종종 무리한 투자를 감행하는 그의 성격은 이런 변명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방패막이였다.



"장거가 최근에 시작한 사업이 자금난에 부딪혔다고 하더군. 은행 대출이 막혀서 찾아온 걸 외면할 수가 없었어. 그런데 그 녀석 자존심에 내 이름으로 돈을 빌리는 건 죽어도 싫다 해서 어쩔 수 없이 대리인 이름을 빌려 송금해 준 거야."


"……"


"걱정했어? 미안해. 다시는 당신 몰래 이런 일을 만들지 않을게. 장거의 사업만 안정되면 곧 돌려 받을 돈이니까, 너무 염려 하지 마."


"당신……"



주윤의가 빅터의 손을 붙들었다.



"장거의 자존심에 그런 부탁을 할 리 없잖아요. 그 사람은 당신의 친구이기도 하지만 제 친구이기도 해요. 자신이 잘된 일을 자랑하는 건 날이 새도록 떠들어 댈 사람이지만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는 입도 벙긋하지 않을 사람이에요. 마치 실패는 한 번도 없다는 듯이 성공만 하는 사람처럼 자신을 부풀리는 남자가 자금난에 시달린다고 수백만 달러를 당신에게 빚진다고요?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장거는 당신이 아니라 니스벳을 찾아가겠죠. 잊어버렸다는 것처럼 연기하지 마세요. 말이 안 되잖아요. 수백만 달러가 빠져나갈 일을 당신이 잊을 리가 없잖아요. 왜 내게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빅터?"



절실하게 자신을 붙잡고 묻는 아내의 목소리가 빅터의 심장을 찔렀다. 평소라면 부드럽게 그를 달래거나,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내의 앞에서 거짓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물론 진실을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빅터는 지친 목소리로 애원하듯이 말했다.



"더 이상 물어보지 말아 줘. 당신이 알아서 좋을 일이 아니야. 당신이나 우리에게 해가 되는 일은 절대 아니니… 그것만은 믿어줘. 이건 그냥… 내가 해결해야 할 복잡한 문제야. 시간이 지나고, 모든 게 정리되면… 그때는 당신에게 모두 설명할게. 그러니 제발, 지금은 나를 믿고 기다려 줄 수 있어?"



빅터의 애원에 주윤의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을 더욱 조심스럽게 고쳐 잡았다.



"… 괜찮다고 말해줘요, 빅터. 아무 일 없을 거라고 말하면서 제게 키스해 줘요."



빅터는 불안에 떠는 몸을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그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빅터가 지켜 주어야 할, 그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 자신 때문에 울고 있었다. 캠버와의 위험한 관계가 평온하고 안전한 세계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내 아내가 울었어. 며칠 전에. 당신 때문에 만든 가짜 이름이 적힌 이체 내역서, 내가 당신에게 돈을 보냈다는 그 흔적 때문에. 당신은 이 거래를 시작하면서,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내 돈, 내 시간, 내 명예와 내 지위까지."


"이 선택을 한 건 당신이잖아, 험멜."



캠버의 대답은 빅터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냉정했다. 빅터는 캠버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 진창 속에서 함께 뒹굴고 있는 공범에게 자신들의 일로 인해 깨진 파편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캠버는 교묘하게 선을 그었다. 선택한 것은 빅터였고, 그 책임 역시 오롯이 그의 몫이라고.
그 순간 빅터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이 남자에게 감정적인 호소나 죄책감의 공유 따위를 기대했던 것 자체가 잘못이었다. 캠버는 철저한 비즈니스맨이었고, 이 관계 역시 그의 수많은 거래 중 하나에 불과했다.
빅터의 입가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 냉정하기 짝이 없는 그에게 속절없이 휘둘리고 있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우스웠다.



"하… 하하, … 그래, 당신 말이 맞아. 선택은 내가 했지. 그러니 책임도 내가 져야 하는 거고. 내 아내의 눈물도, 당신과의 이 거래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도 전부 다."


"그래, 그렇지."



캠버가 자신의 서류 가방을 다시 끌어왔다. 그는 빅터를 남겨두고 사무실을 조용히 떠났다.



갤러리는 결국 그곳에 세워졌다. 거의 시기 적절하게 우연히 땅값이 오르고, 그 중심에 세워진 갤러리를 사람들은 당연히 다른 시선으로 쳐다보게 되었다. 뒷이야기를 짐작하지 못하는 일반인들도 이제 캠버 갤러리라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으니. 시세 차익도 막대했다. 돈과 명예. 캠버는 그것을 정확히 얻어냈다.
캠버는 일주일 중 꼭 6일을 외박했다. 그러나 부인은 캠버의 무엇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저 돈과 사람만 가져다 주면 좋아하는 여자였다.

이유는 익숙한 방으로 들어와 지퍼백에 들어있는 오래된 휴대폰을 꺼내 보았다.
단지 화를 쏟아낼 대상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이 모든 건 네 탓이라고, 내가 불행한 건 너 때문이라고. 그 대상이 사라지자 이유의 삶은 지독하게 빈곤해졌다.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너는 왜 잘 지내니, 제이야. 나는 이렇게 못 지내고 있는데. 왜 행복하니.
못 지내면 또 못 지내는 대로, 내가 그럼 뭐 때문에 너 대신 매 맞아가며 살았는데. 잘 지내야 할 거 아니야.
지독한 탓이 또 시작되었다.

배터리가 다 방전된 휴대폰은 전원 버튼을 눌러도 켜지지 않았고, 이유는 아무런 의미없이 반응이 없는 휴대폰의 키패드를 1번에서부터 #까지 차례대로 눌러보았다.

그 어떤 미안함도 가지지 않았다.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어.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냐?
그게 기본이 되어버린 인간은 이렇게 되어먹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기껏 모든 걸 엉망으로 헤집어버리고 무책임하게 떠나왔어도 이렇게 익숙한 짓을 반복하지. 평범하게 살기는 무슨. 이유는 스스로의 생각에 코웃음을 쳤다.

떠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저 나를 좀 봐 달라고.
내가 필요하다고 말해 달라고.
그러니 가지 말아 달라고, 그런 말로 날 붙잡아 주길 바랐을 뿐이었다.

어디쯤인지 궁금했다.
발신도, 송신도 되지 않는 2G 휴대폰은 어떤 대답도 들려주지 않는다.
이유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휴대폰을 다시 지퍼백에 넣어놓았다.

누군가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면,
그건 이미 오래 전에 주어졌었다.





"잠깐 나와 있었는데 지금 갈게, 여보. 당신이 갈 수 있는 곳이면 나도 다 갈 수 있다고 했잖아."


이유는 익숙하게 전화를 걸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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